실험 이야기[kor]

🧠 기억을 잃은 남자, 헨리 몰레이슨 이야기

sciencelabotory 2025. 8. 25. 09:00

한 남자가 잃어버린 ‘내일’

커튼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벽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킨다. 헨리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곁에서 간호사가 그를 반겼다.

“좋은 아침이에요, 헨리.”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이 짧은 대화는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그는 주변 사람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맞이했다. 식사도, 방문도, 몇 분 전의 대화도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는 하루. 그의 인생은 끝없는 ‘지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한때 평범했다. 1926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태어난 헨리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은 상냥한 소년이었고, 친구들과 야구를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뇌전증 발작이 그를 괴롭혔다. 10대가 되자 발작은 더욱 잦아졌고, 스무 살이 넘을 무렵에는 정상적인 생활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해졌다[1].

 

가족은 온갖 약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1953년, 그를 구해줄 거라 믿었던 전례 없는 뇌 수술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그 수술은 헨리의 삶을 두 개의 시간대로 갈라버렸다.

 

수술 이전의 삶,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30초짜리 현재가 반복되는 이후의 삶.


🧠 1. 뇌를 고친다는 희망 – 실험적 수술

당시 뇌전증은 현대처럼 약물치료가 발달하지 않아 극단적인 방법이 종종 제안되었다. 신경외과 의사 윌리엄 스코빌(William Scoville)은 뇌의 특정 부위를 제거하면 발작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마(hippocampus)가 발작과 관련 있다고 믿었고, 헨리에게 양측 해마와 편도체 일부를 제거하는 전례 없는 수술을 진행했다[2].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발작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헨리는 이후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

 

그의 시계는 늘 현재에 멈춰 있었고, 어떤 사건도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았다[3].


🔬 2. 심리학을 뒤흔든 연구 대상 H.M.

헨리의 상태는 뇌과학자들에게 전례 없는 연구 기회를 제공했다. 브렌다 밀너(Brenda Milner)는 헨리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억상실 환자 “H.M.”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매번 새로운 사람처럼 연구자들을 맞이했지만, 이상하게도 **운동 기억(절차적 기억)**은 보존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별을 거울을 통해 그리는 실험에서 헨리는 처음엔 서툴렀지만, 매일 조금씩 실력이 향상됐다. 그는 전날 연습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손은 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4].

 

이 실험은 기억이 단일하지 않으며, 절차적 기억과 사실 기억이 다른 뇌 회로를 통해 저장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5].


💔 3. 실험실 밖의 이야기 – ‘사람’ 헨리의 하루

🏠 가족의 기억, 끝없는 안타까움

수술 직후, 가족은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헨리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발작은 사라졌지만, 내 아들은 매일 아침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대합니다.”[6]

 

어머니는 짧은 장을 보고 돌아오자 아들이 이렇게 묻는 날을 기억했다.

“어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헨리, 방금 마트 갔다 왔잖니.”
“아… 그렇구나.”

 

그는 방금 일어난 사실조차 잊은 채, 늘 낯설게 질문을 반복했다. 가족은 그의 발작이 멈춘 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우리 아들은 이제 어디까지가 우리와 함께한 기억일까’라는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7].


🧪 연구자 수전 코킨과의 40년

수전 코킨(Suzanne Corkin)은 1962년부터 40년간 헨리를 연구하며 매일 그와 마주했다.

“헨리는 늘 정중했고,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했어요. 하지만 매일같이 그를 소개해야 했고, 그때마다 마음이 무너졌습니다.”[8]

 

코킨은 어느 날 이렇게 물었다.

“어제 뭐 하셨는지 기억나요?”
“아니요.”
“오늘 아침은요?”
“그것도…”

 

그는 자신의 기억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이해했지만, 매번 잊고 다시 물어야 했다. 이런 대화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었다[9].


😢 끝없는 반복과 감정의 흔적

헨리는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매번 이렇게 말했다.

“와, 이거 처음 보는 것 같아요.”[10]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프로그램을 보고 느낀 ‘즐거움’은 잠시 마음속에 남았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보고 감정 기억은 해마가 아닌 다른 경로를 거쳐 저장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11].


✈️ 사라지지 않은 두 개의 기억

코킨은 헨리가 평생 또렷이 기억하는 두 사건을 밝혀냈다.

  1. 청소년 시절 졸업 선물로 탔던 비행기 여행
  2. 아버지 몰래 담배를 피우다 들켜 혼난 일

그는 이 두 이야기를 매번 같은 표정과 말투로 생생히 떠올렸다. 아마도 강한 감정이 결합된 기억만이 ‘망각의 파도’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연구자들은 추측했다[12].


🌌 4. 헨리가 남긴 메시지

1974년에 HM과 그의 어머니는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있는 친척 집으로 이사했는데, 그 친척이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Courtesy Suzanne Corkin, https://www.pbs.org/wgbh/nova/article/corkin-hm-memory/

 

 

헨리는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단편 영화 같아요. 한 장면이 끝나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그 사이가 다 사라져요.”[13]

 

그리고 또 다른 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 통해 사람들이 배운다면, 그게 좋은 일이죠.”[14]

 

그는 기억을 잃은 채 살았지만, 그 삶은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기억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신경과학은 기억의 구조를 이해하고, 알츠하이머와 같은 질환을 연구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15].


📚 참고문헌

[1] Dittrich, L. Patient H.M.: A Story of Memory, Madness, and Family Secrets. Random House, 2016.
[2] Scoville, W. B., & Milner, B. (1957). Loss of recent memory after bilateral hippocampal lesions. J Neurol Neurosurg Psychiatry, 20(1), 11–21.
[3] Corkin, S. (2013). Permanent Present Tense. Basic Books.
[4] Milner, B. (1962). Les troubles de la mémoire accompagnant des lésions hippocampiques bilatérales. Physiologie de l’hippocampe.
[5] Squire, L. R. (2009). Memory and Brain Systems.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6-14] Science Friday Interview (2013); The Guardian (2013); Simply Psychology (2022); Diane Rehm Show (2016).
[15] Squire, L. R., & Zola-Morgan, S. (1991). The medial temporal lobe memory system. Science.